프랑크푸르크에서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이 사람은 집안의 유대 교육 전통에 걸맞게 처음에는 율법학자가 되려 하였으나 20대 초반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첫 번째 부인이 된 여자 친구 프리다 라이히만을 통해서 정신분석학을 접하고서는 탈무드 공부에서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꿔버렸다. 그의 특별한 관심은 언제나 개개인의 개별적인 정신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 및 연관구조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낸 어떤 존재의 개별적인 정신에 있었다. 스물두 살에 알프레드 베버의 지도로 사회과학 박사학위를 받은 에리히 프롬은 베를린 대학에서 정신분석전문가 훈련을 받은 후 1930년에 심리학 및 사회심리학 문제에 대한 전문가로서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와 계약을 맺었다.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좌익이라 인식하고 있던 노동자들과 직원들의 정치적 태도에 대하여 분석적이며 사회심리학적인 장 연구를 최초로 적용하였는데 공개적인 설문지를 사용한 정성적인 조사연구였다. 훗날 1930년대의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이름을 널리 떨쳤던 권위와 가족을 문제장으로 삼은 것은 에리히 프롬으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에리히 프롬이 고유하게 이룩한 업적은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과 정신분석학적 사회심리학적 방법의 개념을 개발하여 개개의 사회적 성격을 경험적으로 유형화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가 스스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개개인을 열정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행동하도록 하는 사회경제학적 관계의 관점에서 사람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일에 그는 평생을 바쳤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 결정인자와 심리적 결정인자를 연관 지어 생각했다는 것과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으로 독립적인 분석적 사회심리학적 사고의 실마리를 형식화하였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역사가 되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연관성의 규범을 심리적 건전성을 위한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하였고 연관성 규범이 지원하거나 혹은 방해하는 자격능력을 생산적 및 비생산적이라는 사회적 성격의 방향에서 구분하였다. 규범적인 인본주의에 얽매여 구분하였던 것을 훗날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개념적으로 즉 산 자 사랑과 죽은 자 사랑 내지는 존재하기와 소유하기로 방향을 잡은 사회적 성격으로 형식화하였다. 1933년부터 미국에서 그리고 1950년부터는 멕시코에서 살았던 에리히 프롬은 직업교육에 관한 산업문화에서 유래된 사회적 성격 방향잡기를 연구한 끝에 자기 경험 상실로 나타나는 시장형 성격을 1947년에 발견하였다. 훗날 다른 사람들이 경계선 증후군과 자기애 장애라고 인식하였던 시장형 성격을 에리히 프롬은 소외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사회심리학에서의 두 번째 발견은 1964년에야 완성되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학설로서 죽은 자를 사랑하는 사회의 연관성 규범이 죽음의 무리들에게 언제나 앞자리를 내어주어서 이러한 사회적 성격이 인류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발전한다고 하였다. 1900년에서 1980년까지 일생을 사는 동안에 에리히 프롬은 사회정신 연구에 몰두하면 할수록 점점 글 쓰는 학자임을 고집하였고 책에 얽매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수많은 강연 약속 때문에 그는 일 년에 두 번씩 멕시코시티에 뉴욕으로 여행하였다. 그는 책으로 생활하였을 뿐 아니라 책을 위해서도 살았다. 약 20권의 저서 가운데 일부는 수백만 권씩 팔렸고 40개에 가까운 언어로 번역되었다. 독일어로는 1980년에서 1981년에 열 권짜리 전집으로 독일출판연구에서 출간하였고 1989년에 dtv 출판사에서도 이 전집을 문고판으로 발간하였으며 1989년에서 1992년 사잉 다시 벨츠 출판사에서 여덟 권으로 발행하였다.
심리학자와 심리학
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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