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아들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및 칼 융의 분석심리학과 함께 고전적 심층심리학의 세 학파에 속하는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사람이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강조
알프레드 아들러는 1902년부터 9년 동안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일하다가 1911년에 결별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는 반대로 그는 개인이 목표지향적이며 전체성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잘 터득하고 있던 심리학에다가 전체성 심리학과 게슈탈트 심리학 그리고 빌리암 슈테른의 개인주의를 접합시키면서 자신만의 견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열등감과 보상이라는 두 기둥으로 이루어진 개인심리학 이론은 기본적인 부분이 1912년에 마련되었고 그리고 다시 1920년대에 연대감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변형 확장되었다. 빈에서 맞은 이때가 학파로서 그리고 운동으로서 개인심리학의 전성기였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출생과 이력
알프레드 아들러는 1870년 2월 7일에 오스트리아 빈의 교외 루도우스하임에서 유대계 곡물상인의 여섯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훗날 빈의 서민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실질적이고 교육적인 자세로 일하게 된 연유가 골목놀이 시절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하였다.
1988년부터 1895년까지 의학을 공부했고 적어도 마지막 대학시절에는 사회주의 학생연맹의 회원이었으며 같은 연맹의 회원이던 러시아 여학생 라이싸 티모페예브나와 1897년에 결혼하였다.
알게마이네 크랑켄하우스 병원 옆에 있는 병원 구역인 제9구역 아이젠 가쎄 22번지에 진료실을 개설하려다 실패한 후에 1899년에 프라터 공원 근처 체르닌 가쎄 7번지에 병원을 개업하였고, 1911년부터는 도미니카너 바스타이 10번지에 신경과를 개업하였다. 1898년부터 1903년까지의 기간에 다섯 가지 사회의학 활동에 참여하였는데 이것은 사회문제와 사회개혁에 그가 보인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1902년부터 첫 가담자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수요심리학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모임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고무적인 토론자였고 때때로 그 모임 안에서 의장 역할을 하였으며 빌헬름 슈테켈과 함께 정신분석학 중앙소식을 발행하였다.
1907년에 발간한 첫 번째 큰 저작인 신체적 열등과 정신적 보상에 관한 연구에서 질병과 신경증은 열등한 신체기관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보상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며 또한 역으로 보상이 높은 성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명제를 제기하였다.
여기에서 1909년부터 1910년에 성격이론과 신경증이론을 개발하여 1912년에 발간한 주저서 신경증 특성에서 폭넓게 설명하였는데,
열등감은 우월감으로 보상된다고 하며 이것이 열등감이 굴욕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안전장치로 작용한다
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한테도 약간씩은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신경증이 되기 쉽다는 열등감은 어느 신체기관이 열등할 때 혹은 천덕꾸러기로든지 응석받이로 자랐을 때 혹은 여성들이 무작정 문화적으로 낮게 대우받았을 때 일어난다고 하였다.
열등감 혹은 낮은 자존심을 보상받고 극복하려는 노력은 패배에 대항하는 안전조치의 기제로서 혹은 남자다운 항거로서 명예 추구, 권력추구, 대인 회피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알프레드 아들러가 내린 교육학적인 결론은 순종적이 되라고 양육하지 말고 양성평등에 주의 하자는 것이었다.
1908년부터 성욕이 신경증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위치, 공격충동 그리고 남성다움 과시 등을 둘러싸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의견이 대립하였다. 1911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결별한 뒤 알프레드 아들러는 자유 정신분석학 협회를 결성하였고, 1913년부터는 명칭을 개인심리학 협회로 바꿨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과 뒤따른 사회개혁 변화에 따라 1918년에서 1919년에 알프레드 아들러는 연대감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그의 이론을 개발하면서 그는 권력추구를 극복할 수 있는 또는 권력추구를 긍정적인 사회적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찾았다. 그는 심리적 장애를 본질적으로 단지 관계장애라고 보았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활동
알프레드 아들러는 독일공화국 및 오스트리아공화국의 자신의 일이라고 동일시하였고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공산주의로 물든 붉은 빈을 개혁하는 일, 특히 학교개혁, 교육개혁 그리고 국민교육에 참여하였다. 교육자, 개혁자, 대중 연설가 그리고 조직 전문가로서 일하고 활동하였는데 대부분 사회민주적 성향을 지녔던 추종자들의 수가 꾸준하게 늘어남에 따라 마치 날개를 단 것 같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붉은 빈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개인심리학은 임상심리학과 교육학 분야에서 실질적인 학문으로써 전성기를 맞았으며 정규심리학 과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뛰어난 능력은 학교와 교육기관과 함께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교육 상담소를 여러 곳에 마련하는 데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개인심리전문가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실험교실에서, 1931년부터는 실험학교, 유치원, 고아원, 어린이집, 다양한 치료교육시실에서 그리고 신경증 치료 외래진료소에서 일하였으며 아동보호시설에서 하는 사회주의적 교육방식에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학교 임상분야에서 집단요법이 처음 시작되었다. 교사, 교육담당자 그리고 일반 대중을 위하여 빈 시립교육연구소와 여러 국민교육시설에 강연, 세미나, 연구 교육과정을 개설하고 알프레드 아들러 자신이 이일을 모두 담당하였다.
이때에 나온 가장 중요한 저술이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였다. 개인심리학은 오스트리아 빈에서부터 독일, 유럽 그리고 유럽 밖의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1926년부터 주로 미국을 드나들었으며 1932년에 뉴욕 롱아일랜드 의과대학의 객원 교수가 되었다. 1933년에 발간된 인생의 의미에서 가장 뚜렷하게 표현된 바와 같이 그의 이론은 1930년대 초에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특히 강조하였다. 끝내 1935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했으며 미국의 코틀랜드 애버딘에서 1937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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