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은 1875년 7월 26일에 스위스의 투르가우 주 보덴제 호수 가장자리의 케스빌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동기와 소년기의 대부분을 아홉 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스위스 바젤 시 근처의 클라인휭잉엔에서 보냈는데, 거기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1879년부터 1896년까지 마을 목사면서 또한 바젤 시의 프리트마트 지방 정신병원의 병원 목사 직무도 같이 보고 있었다. 바젤에서 김나지움을 마치고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지만 모두 범상하지 않았으며 강한 성격이셨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께서 수십 년 전에 교수로 활동하셨던 바젤 대학에서 1875년부터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의사였던 할아버지 칼 구스타프 융은 당시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에 휩쓸렸기 때문에 만하임 대학을 떠나야만 했고 알렌산더 폰 훔볼트의 추천으로 1822년에 바젤 대학으로 옮겨 거기서 의학과 설립 및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바젤 대학의 역사에 남았다. 외할아버지 자무엘 프라이스베르크는 바젤 지방의 오래된 가문 출신으로 신학과 교수 겸 바젤의 신교도 성직자 대표 목사였으며 또한 중동지역 언어에 관한 대단한 전문가였고 신비롭고 종교적인 찬송가를 많이 작사하였는데 이들 노래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에도 잘 알려져 있다. 열세 명의 자녀들 가운데에서 자라나 대가족의 어른이 되셨고 학식이 많고 막강하면서 비밀스러운 점이 있던 할아버지 두 분은 오히려 칼 융이 자란 가난하고 억눌려 있는 가정 분위기를 유지시키면서 칼 융의 개인적인 발달과 업적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칼 융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적이며 개인적으로 각인되었던 것으르 내면에서 점점 더 의식하면서 성장하였고 또한 언제나 관찰되었던 예외를 평생의 일감으로 삼았듯이 가능하면서도 일반적인 초인적 법칙을 조심스레 과학적으로 완성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점점 더 의식하였다. 1900년 12월에 대학을 마치고 취리히에 있는 부르크횔츨리 정신요양원 오이겐 블로일러 원장의 두 번째에 들어감으로써 칼 융은 심적인 것으로 들어가는 조심스럽고 아주 경험적인 입구를 만나게 되었다. 1904,1905년부터 취리히의 부르크횔츨리 정신 요양원에서 수행하였던 연상 실험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일반적이며 통계적인 반응 법칙을 찾을 수 있었지만 이것은 단지 예외들, 즉 의심스럽고 결함 있는 반응들 각각에게 어떤 근거만 만들어 줄 뿐이었다. 그가 하던 일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잡아주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운명적으로 만나도록 해 준 것은 예외 쪽으로의 방향 전환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강박관념 기제 원칙에 따라 연상 실험에서 장애 반응을 해석하는 방법이 히스테리와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의 이치에 맞지 않는 증세, 그림, 개념의 의미를 판독하는 바로 그 방법이라는 것이 갑자기 분명해졌다. 당시의 과학계에서 전적으로 금기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결과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론과 잘 일치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데에는 칼 융에게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였다. 연구자로서 칼 융이 보인 견식과 활동은 병원 의사로서의 능력과 한계를 곧바로 뛰어넘어 버렸다. 개인 진료실을 내기로 결심하고 1909년 3월에 수석의사직을 사임한 다음 1909년 6월에 취리히 호숫가 퀴스나하트에 새로 지은 화려한 저택으로 이사하였다. 칼 융이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사건이 곧바로 정신분석학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대단한 학문적 명예를 가져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몇몇 다른 유명한 유럽 학자들과 함께 칼 융은 미국 심리학자 스탠리 홀로부터 미국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에 있는 클라크 대학 20주년 잔치에 초대받았으며 이 잔치에서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6주일 동안의 미국 여행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산도르 페렌치와 날마다 함께 지내는 사이에 칼 융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사이에는 최고점뿐만 아니라 전환점이 동시에 생겼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몇몇 특이한 반응이 칼 융을 당혹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꿈에 대한 상반된 해석에서 칼 융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제약을 받고 있을 뿐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모든 상징에 대한 해석을 금기시된 쫓겨난 욕망으로 돌리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원칙과 칼 융이 몇몇 꿈에서 독자적으로 발견한 것이 완전히 정반대였다. 몇몇 상징들이 칼 융에게는 오히려 더 크고 집단적인 어떤 의식이 있음을 알려주는 전령으로 보였다. 또한 유아 성욕에 대해서도 칼 융은 아우구스트 포렐, 오이겐 블로일러 그리고 모든 취리히 연구자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처럼 중점을 둘 만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칼 융은 무의식에 관한 자신의 벗어난 견해를 나타낸 무의식의 심리학을 저술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무의식의 심리학이 정신분석 및 정신병리 연구 연보에 발표된 지 2년 후인 1913년에 뮌헨에서 열린 제4차 국제정신분석학대회에서 비로소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칼 융과 그의 스위스 동료들의 견해를 프로이트 자신으로부터 나온 정신분석학을 정통성 없이 확장한 것이라고 평가하였고 칼 융은 즉시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직과 연보 주필직을 사퇴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칼 융은 정신적인 고립감과 불확실성에 빠지는 고통을 받았다. 취리히 대한 강사직을 사임하고 정신과 의사 및 심리치료사로서 국제적인 실무를 조금 하는 것 이외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내부적 상징들과 싸우는 데에 몰두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결별한 뒤 처음 이룬 큰 성과는 1921년에 두꺼운 책, 심리학적 유형을 발간한 것이었다. 이것은 뒤늦은 감이 있었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드 아들러와 간접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왜냐하면 칼 융에게는 이 두 사람과의 공동작업에서 경험한 사고방식과 견해 방식의 차이를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정리하고 그 가치를 정해 두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전형적인 의식적 태도와 조함을 이루도록 하여 서로 다른 모두 8가지 유형으로 구별하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든 유형은 무의식이 반대 유형으로 작동하여 보상의 의미로 보충된 것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점이며, 여기서부터 뒤이어 오는 폭넓은 학문적 업적 전체에서 인간 심리의 대립본성과 그것의 통합경향이라는 칼 융의 기본 주제가 나타났다. 이어서 칼 융은 연금술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 성과는 대단하였다. 칼 융은 13-17세기 연금술 원문들의 상징언어를 엄격한 어문학적 방법으로 해독한 결과, 스스로 경험하였던 개성화 과정의 상징과 요법에서 관찰하였던 상징, 두 상징이 구조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술사들이 소재의 특성이라고 여겼던 혹은 투사하였던 것을 칼 융은 집단적 무의식이 투사된 심리학이라고 이해하였다. 연금술의 상징들은 반대방향으로 주어진 원형적 동기로서 이것은 현대인의 꿈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연금술에서 금으로 변환하는 과정과 개성화 과정은 중심 주위를 돌기에 해당하며 그리고 만다라 그림에서 상징화된 것처럼 대립과의 합일에 해당된다. 여기서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상 아니마와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상 아니무스로 상징 속에 나타나는 개인의 심리적인 이중적 성감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개성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1928년부터 죽을 때까지 연금술 문헌과 씨름한 끝에 칼 융은 연금술 문헌에서 역사적 연속성이 있음을 확인하였고 모든 개인적인 그리고 역사 문화적인 차이를 모두 뛰어넘는 원형적 내용과 동기가 무의식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칼 융은 1935년에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연방공업대학의 일반심리학 명예교수로 초빙되었고 1944년에는 바젤 대학 의심리학 정교수로 옮겼으나 그다음 해에 건강을 이유로 퇴임하였다. 1948년에 몇몇 제자와 동료들이 취리히의 퀴스나하트에 심리요법 훈련기관인 칼 구스타프 융 연구소를 세웠다. 영어로 먼저 출간된 무의식 접근을 완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1년 6월 6일에 퀴스나하트의 자택에서 칼 융은 사망하였으며 이 책은 1968년에 인간과 상징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독일어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심리학자와 심리학
칼 구스타프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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