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가 했던 연구와 업적에 대해서도 알아보려고 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생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에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아주 젊은 어머니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아버지가 그 이전에 적어도 한 번 결혼했다고 하니까 그는 아주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3세 때 빈의 제2구로 이사 가서 여동생 네 명, 남동생 한 명과 함께 검소하게 자랐다. 지그문트 포로이트는 뛰어난 학생이었고 자연에 관한 수필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듣고 의학을 선택하였으나 박사학위까지는 시간이 비교적 길게 걸렸다.
지도교수 에른스트 브뤼케는 의학의 새로운 갈래인 신경학으로 그를 이끌어 주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몇몇 중요한 성과를 보이며 정말 빠르게 대학강사와 유명한 신경학자가 되었다. 파리에서 장 샤르코에게서 공부하였고 낭시에서 히폴리테 베르넴과 암브로아 레보에게서 최면술을 배운 다음, 배운 기술을 빈에서 실제로 사용하였다. 그는 코카인의 마취효과를 거의 최초로 발견할 뻔하였으며 이 시기에 유명한 의사 요젭 브로이어와 함께 일하였다.
4년의 약혼기간을 지내고 함부르크 출신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1886년에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 1895년에 태어난 막내 안나는 정신분석가가 된 유일한 자녀였으며 장남 마르틴은 1930년대에 국제정신분석학 출판사의 소장이었고 가장 어린 아들 에른스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교환한 편지를 출판하는 사업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았다.
일대기를 쓰는 작가들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생애를 복잡한 드라마처럼 꾸미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세계의 정신적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으며 문화사적으로 몇 안 되는 위업을 이룩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평범하며 슬픈 일이 별로 없었던 단조로운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분명히 알아야 한다.
슬펐던 일은 1920년에 딸 조피를 잃었고 1923년에 조피의 아들을 잃은 것이었다. 같은 해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구강암에 걸렸지만 수많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잘 견뎌냈다. 1938년에 빈을 탈출하여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1938년에 9월 23일에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연구와 업적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영혼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려 하였고 히스테리의 원인을 규명하려 하였다. 히스테리 연구는 요젭 브로이어와 함께 시작하였으며 1895년에 유명한 책 히스테리 연구를 함께 발간하였다. 두 사람이 갈라선 다음, 그리고 189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베를린의 유명한 이비인후과 전문의사인 빌헬름 플리스와 편지왕래로 자기 분석을 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의미에선 빌헬름 블로이트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분석이 끝난 다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빌헬름 플리스는 결별하였고 이 과 정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유명한 꿈의 해석이었는데 1899년에 집필을 마쳐 1900년에 발간되었다. 1902년에 빈의 의사 네 명, 알프레드 아들러, 빌헬름 슈테켈, 루돌프 라이틀러 그리고 막스 카하네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주위로 모였고 1903년에 파울 페더른이 뒤따랐으며 1906년에 오토 랑크가 이 모임에 가담하면서 비서가 되었다. 이 모임이 자라서 수요심리학 모임을 거쳐서 1910면에 빈 정신분석학회가 되었으며 1906년 10월부터 수요심리학 모임을 기록으로 남겨 두어서 나중에 피셔 출판사가 네 권짜리 책자로 발간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뛰어난 업적은 인간의 무의식적인 정신삶을 발견한 것이었다. 무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이미 대체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었으며 철학자와 시인들이 이 개념을 소재로 사용하였으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정신의 한 심급이며 전의식과 의식의 아래에 있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최초의 위대한 발견은 정신삶의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는 장소적인 문제에 대답을 준것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쾌락의 추구가 리비도라고 이름 붙인 에너지에 의하여 지배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리비도는 프로이트가 사용한 유일한 낯선 용어로써 독일어 단어 쾌락이 두 의미, 즉 만족을 향한 욕망과 만족 그 자체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 두 성질 모두를 뜻하는 리비도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성용과 동일시하였고 어쩌면 더 이를지는 몰라도 늦어도 태어날 때부터는 존재하는 소아의 성욕을 발견하였다. 사춘기 때 오는 것은 생식활동으로 이것은 성욕이 아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정신삶은 언제나 육체와 영혼의 연결이었다. 해부학은 그에게 숙명이었으며 삶의 두 성질은 단지 이론에서만 나뉘어서 취급될 뿐이었다. 심리적인 것은 언제나 신체적인 것의 대변자였다. 이 대변자는 이런 현상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생물학적인 부분만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욕 즉 리비도는 생활을 통제하는 힘이며 성욕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이 고전적인 신경증 , 즉 히스테리, 강박신경증, 불안신경증의 원인이었다.
1910년 이전에 이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의식과 함께 무언가 다른 힘이 더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확실하였다. 그때까지 그에게 의식 및 전의식과 같은 의미로 그리고 무의식과는 반대 의미로 자아가 이해되었다면 자아도 부분적으로는 무의식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자기애 현상에서 깨달았다. 자기애는 자아가 리비도에게 점령당한 것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토론하는 과정에서 특히 알프레드 아들러, 파울 페더른 그리고 타우스크가 자아의 의미를 지적하였는데 알프레드 아들러는 사회적 자아의 의미와 공격성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기애의 개념을 1912년에 도입하였는데 이로써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자신의 독창적인 장소적 개념을 세 가지 기본적인 정신 원칙으로 정리하는 데에 15년 이상 걸린 셈이었다. 1919년부터 1923년 사이에 세 가지 큰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현재 정립되어 있는 정신분석학을 그때 확립하였다. 그가 공격성을 자아 및 의식의 일부분이라고 독창적으로 가정하였기 때문에 저서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에서 죽음충동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동일한 의미를 가진 두 가지 충동 즉 리비도 혹은 성애 그리고 죽음의 충동 혹은 타나토스가 있다고 하였다.
1911년에 알프레드 아들러가 여섯 추종자들과 함께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서 떨어져 나갔고, 1913년에는 칼 융이 그리고 1924년에는 오토 랑크가 떨어져 나갔다. 이들 모두는 정신분석학 운동에서 떨어져 나와서 그들 고유의 학파들을 세웠다. 정신분석학회는 큰 성과를 거뒀고 1936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빈에서 80회 생일잔치를 벌일 수 있었지만 정신분석학회는 2년 후에 유럽에서 실질적으로 추방되어 나중에는 오히려 영어권 국가들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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