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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와 심리학

에른스트 모이만

by ▒▧∮˘¤∂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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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모이만의 일생

에른스트 모이만은 신교 목사인 프리드리히 모이만의 아들로 1862년에 라인 강가의 작은 도시 우어딩엔에서 태어났다. 1915년에 함부르크에서 사망하였으며 1911년 이래 일반강좌와 식민지연구소에서 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심리학 교수직을 각각 가지고 있었다. 에른스트 모이만은 단지 학문적으로만 일하지 않았고 공직생활도 하였으며 평생 동안 정치적인 사람이었다.

 

개신교 신학공부를 철학 공부나 심리학 공부보다 전적으로 우선시하였던 학생 시절에는 특히 국가주의적 보수주의적인 활동을 두드러지게 하였는데 그는 독일학생연맹의 지도적 회원이었다. 1886,1887년 겨울학기에 본 대학 신학과에 등록한 그가 바로 신학생도 청원서를 쓴 장본인이었다. 이 청원서는 독일의회의 중앙당이 신학생도들을 일반 병역의무에서 면제시키려고 준비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에른스트 모이만이 주도하고 많은 개신교 신학생도들이 서명한 이 청원서의 내용은 "한마음이 필요한 이떄 개신교 신학생도들도 일반병역의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존경하옵는 독일제국의회가 선처하여 주시기를 청원합니다"는 것이었다. 이 청원서는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기독교회의 독선적인 신앙 자세에 의구심이 들면서 심각한 신앙 위기에 극심하게 시달리던 에른스트 모이만은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던 원초적인 직업목표와 거리를 두는 대신 학문적인 경력을 쌓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험심리학에 대한 관심 때문에 8년 동안 학생으로서 다방면으로 방랑생활을 하면서 튀빙엔 대학, 베를린 대학, 할레 대학, 그리고 본 대학을 전전한 끝에 1891년에 라이프치히 대학 빌헬름 분트의 심리학 실험실에 도착하였다.

 

에른스트 모이만의 업적

6년 후 에른스트 모이만은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 및 일반교육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나중에 그의 일생 사업에서 탁월한 업적이라고 불린 것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경험적 실험적 심리학이 거둔 방법과 성과를 교육학에 도입하여 교육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에른스트 모이만은 자신의 연구분야를 실험교육학이라 불렀으며 1900년에 스위스 탈빌에 있는 교수청에서 가졌던 잘 짜인 강의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에른스트 모이만은 학자로서 머물러 일하였던 모든 곳, 취리히에 이어 쾨닉스베르크, 뮌스터, 할레, 라이프치히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부르크 대학에서 교직자들 특히 초등학교 교사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에른스트 모이만이 뮌스터의 빌헬름 대학에서 강의하던 시기에 그의 주저서 실험교육학 및 그 심리학적 기초 입문이 두 권으로 초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교직생들에게는 필수 교과서였다. 1년 뒤에 에른스트 모이만은 현대미학입문을 출간하였는데 미학과 미학의 심리학적 기초에 관한 분야는 그의 두 번째 학문적 주관심사였다. 여기서도 언제나처럼 수준 높고 미적인 일상생활문화를 이끌어 내려는 교육학적 목표를 위한 것이었다.

 

에른스트 모이만의 업적은 동유럽권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모았으며 러시아어, 에스토니아어, 라트비아어로 번역되었다. 마지막 근무처였던 함부르크 대학에서 에른스트 모이만은 특히 초등학교 교사를 위한 경험적 실험적 심리학에 관한 세미나식 교육에 몰두하였다. 여기서 1911년에서 1914년 사이에 실험교육학 및 그 심리학적 기초 입문의 제2판이 매우 확장 보완되어 세 권 분량으로 출간되었다. 교육학에서 적용되는 개인심리학의 기초가 제2권에 언급되었으며 전체 성적인 교육을 지향하는 개혁사상에 따라 지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능력도 중요시하였다.

 

에른스트 모이만은 학문적이며 정치적인 생활만 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레저와 취미 생활도 즐겼다는 것이 그의 동료와 친구들로부터 확인되었다. 그는 아주 열정적인 오리엔트 양탄자 수집가였다. 라이프치히 출신 교사이며 여러 해 동안 평판 좋았던 교육학적 심리학 학술지를 에른스트 모이만과 함께 발행하여던 오토 샤이프너가 아주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자세하게 기억해 내어 스위스의 파울 뮐러 교사에게 에른스트 모이만의 개인 생활에 관한 흥미 있는 사실을 전해 주었으며 파울 뮐러는 1942년에 에른스트 모이만의 일생과 업적에 관한 연구내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에른스트 모이만은 단지 열정적인 오리엔트 양탄자 수집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였다. 수집가와 애호가를 위한 문고 시리즈 제19권 아침의 나라의 카페트 수집가와 애호가를 위한 안내서의 머리말을 그가 썼다. 1915년에 뉴욕 대학에서 수여하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러 갈 예정이었으나 에른스트 모이만은 그 계획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그 직전인 1915년 초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별세하였다. 에른스트 모이만은 상아탑에 있는 학자들과는 반대였다. 교육학적 개혁의 저자이며 사회민주주의자였고 나중에 함부르크 시장이었던 루돌프 로스는 추도사에서 에른스트 모이만을 가장 진보적인 교사들의 요구와 일치하였던 분이었다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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