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크뤼거는 184년 8월 10일에 독일 포젠에서 태어났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베를린 대학, 그리고 뮌헨 대학에서, 특히 빈델반트, 빌헬름 딜타이, 테오도어 립스, 코르넬리우스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는데 당시에는 심리학이 철학에 속해있었다. 빌헬름 분트와 비슷하게 그러나 원숙한 시절에는 빌헬름 분트와는 다르게 실체론적 정신 개념에 빠져들었다. 1897년에 펠릭스 크뤼거는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빌헬름 분트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고 나중에는 킬 대학에서 마르티우스와 빅터 헨젠 아래에서 일하였다. 펠릭스 크뤼거는 특히 심리학적인 음향학자로 그리고 음악심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심리학 실험의 기초에 관련된 논문을 상당히 많이 발표하였으며, 그 가운데 협화음의 이론도 있어서, 이 연구의 일부를 가지고 1903년에 빌헬름 분트 아래에서 정교수 자격을 받았고 그의 제2 조교로 더 머물러 있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심리학 및 철학 교수로 일하면서 심리학 실험실을 갖추는 일에 참여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귀국한 뒤 라이프치히 대학과 할레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실험보다는 민족심리학과 발달심리학 문제에 더 몰두해 있었다. 얻어진 결과를 실험으로써 그리고 더욱이 일상생활에 응용함으로써 검증하려 했던 노력은 대단하였다. 생활과 동떨어진 실험실에서 나와서 들어가자는 펠릭스 크리거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이 역사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사회법칙에 대한 인식처럼 역사법칙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그리고 거대한 전체 속으로 개인을 결합시키는 것이 펠릭스 크뤼거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펠릭스 크뤼거는 좌파에 가까워지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 국민의 민족적 사고, 무엇보다도 바로 피와 땅이라고 표현되는 민족 안에서 개인이 감정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감정이론이라는 것이 언제나 학문적 시대정신을 인간오성 위에 편파적으로 세워 올리는 것임을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펠릭스 크뤼거의 정신이론은 경험에서 찾을 수 있는 성질, 소위 복합성질에서 경험적 정신적인 것의 전체성과 분류성을 분리해냈는데 그때마다 펠릭스 크뤼거는 전체적 체험에 들어 있는 가장 포괄적인 복합성질을 감정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구분되어 있는 게슈탈트들과 감정들 사이에 여러 중간 감정 영역들을 정리하여 집어넣었다. 펠릭스 크뤼거가 매우 보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독일 국민이 되려고 하였으며 1933년까지 학교 유소년들에게 민족부흥을 촉구하였고 많은 국민 계층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과 민주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도록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1933년 5월에 한 연설 때문에 나치학생연맹 및 당시 지도적인 기관들과 마찰을 빚었다. 끝내 1936년에 총장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1938년에 조기 은퇴하였다. 제자들이 청원한 명예학위수여도 그가 인간주의적이며 비교적 편견 없는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이유로 나치 당국이 거절하였으며 게다가 할아버지 항렬에 순수한 유대인 혈통이 있었다는 사실이 가계조사에서 드러났다. 펠릭스 크뤼거는 우선 포츠담에 살다가 1945년 초에 스위스로 옮겨가서 1948년 2월 25일에 사망할 때까지 바젤에 살았다.
심리학자와 심리학
펠릭스 크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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