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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와 심리학

빌리 헬파하

by ▒▧∮˘¤∂ 2022.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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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빌리 헬파하는 거의 사회심리학과 환경 심리학에 이바지한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정치가와 정치 언론인으로서는 거의 잊혀져 있다. 그러나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가장 유망한 자유주의 정치가였으며 몇 년간은 독일 민주당의 수뇌부에 속하였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바덴 주의 교육부 장관이었고 게다가 1925년에는 바덴 주 공화국의 대통령을 겸하였으며, 이 해에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다. 1928년에서 1930년까지 그는 제국의회 의원이었고 제국의회 법제개혁위원회 위원이었다. 연금 없이 어렵게 살아야만 했던 공무원 미망인의 아들 빌리 헬파하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 돈이 많이 드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대학생 때는 글솜씨를 발휘하여 생활비를 벌었다. 그는 특히 1898년부터 1903년까지 독단적이지 않은 사회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수정사회주의자들의 전문지 월간 사회주의자의 동인이었다. 보수적인 대학 환경에서 행여나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1902년까지 에른스트 기스트로우 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빌리 헬파하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은사 칼 람프레히트로부터 역사적인 현상과 동시대 사람들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관찰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배워서 나중에 이를 정치 언론에 활용하였다. 빌리 헬파하는 심리적 문제 상황에서 계급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사회병리적인 현상을 관찰하고 기술하였다. 1903년에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SPD) 전당대회 이후에 그는 수정주의자들과 결별하였다. 특히 빌헬름 분트의 지도 아래 받은 심리학 박사학위와 그리고 의학박사학위로 대학공부를 마치고, 신경과 전문의로서의 전문의사 훈련을 받은 다음 시민적인 자유주의자로 전환하였다. 무산 노동자 계급의 사회병리적 상황을 개선하는 길을 독단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가 아니라 시민계급 안에서 무산 노동자 계급이 단결함으로써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는 사회적 보상이 이루어지는 시민사회 동화 과정을 염두에 두었다. 빌리 헬파하는 1906년에 심리학으로 정교수 자격을 획득하였고 노동 심리학에 관한 책을 써서 사회에 비판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직업생활에서 생기는 사회병리적 현상의 원인을 아직 완성되지 않은 19세기의 기술 변혁에서 그리고 이것과 결부된 사회적인 변화에서 찾았다. 1907년에 빌리 헬파하는 의사협회의 소식지 의사회 소식의 편집국장직을 넘겨받으면서 신경과 전문의사를 찾는 환자가 적었기 때문에 여기서 처음으로 규칙적인 수입이 생겼다. 그는 이 활동을 사회 정치적인 과제로 보았으며 의사협회는 그에게 특정한 정치성을 띤 기관이라는 의미를 뛰어 넘어서 사회발전에 필요한 결정적인 힘을 기를 수 있는 이익대표기구 가운데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및 그 이후의 시기에 빌리 헬파하의 정치 언론활동은 계속 발전하여 1916년 12월 이후부터 빌리 헬파하는 포씨쉐 차이퉁 신문의 동인이 되었다. 의사회 소식에 기고한 방대한 양의 논설에서 그는 특정한 계층을 위한 정책을 뛰어넘어서 전체적인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상황을 논평을 하였으며, 정치이론에 관한 신문 수필에서는 보수적 민주주의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1921년에 빌리 헬파하는 칼스루에 대학에 사회심리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사회과학적 노동 심리학을 연구과제로 하는 이 연구소는 독일 대학에서 이런 종류로는 처음이었으며 그는 직무와 성과를 평가하는 새로운 방법을 연구하도록 하였고 이 연구소가 언론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빌리 헬파하는 새로 설립한 연구소에서 잠깐 동안만 일하고서 1922년에 바덴 주의 교육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민주주의 사상을 강화하며 그 바탕 위에서 사람들의 다양성에 상응하는 과제와 재능 형태를 잘 정돈하여 주는 그런 교육제도를 원하였다.  1921년 이래 그는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보수적 대중정당 창립을 꾸준히 주장하였다. 그는 이것이 공화국을 더욱 성장시키고 반대편에 서 있던 사회계층들을 돌려 붙잡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시대 이전에 이미 빌리 헬파하는 의회주의와 정당제도에 비판적으로 반대하였다. 1932년에 빌리 헬파하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직접 시행해 보지 않더라도 독일이 그 이론으로부터 보수적 민주주의를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치스 집권 이후에도 그는 독일 국민이 이제 잘 정비되어서 민주주의로 귀환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였다. 그는 강연에서 모든 진실한 문화들이 민족과 관련되어 있으며 서로 관용적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강의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 독일에서 이민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빌리 헬파하가 마치 나치즘을 비호하려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나치 비밀경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지적되지 않았다. 그러나 빌리 헬파하는 그 뒤에 모든 정치적 활동을 그만두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정치 언론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연합국의 독일 점령과 재교육이 올바른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으며, 이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나치즘을 청산하는 일이 방해받고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빌리 헬파하는 새로운 나라의 헌법, 서방 편향성 그리고 재무장을 비난하면서 중립주의를 요구하였으나 더 이상 이 젊은 독일연방공화국에 융화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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